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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초년생

서울에서 눈뜨고 코 베이다 ㅜㅜ

내가 맨 처음 서울에 오게 된 계기는 직장을 구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 이 얘기를 나누는 게 내가 너무 찌질해 보이는 것 같고 창피한 일처럼 느껴져 남들에겐 잘 말하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이 일을 기록해 두는 이유는 벼랑 끝에 서 있게 될 때, 인생에서 죄 없는 실수를 하기도 하고, 미숙한 선택으로 곤란을 겪을 때 절망적인 소리에 속지 않기 위해서이다.

 

서울에 오기 전, 3년 동안 해외에서 봉사활동을 하였고 한국에 들어온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취업을 위해, 6개월 동안 토익도 준비하고 운전면허증도 따도 나름 알차게 준비한 것 같다.

유명 일간신문지에 '원어민처럼 영어를 익히는 학습법'이란 광고를 몇 번 보았었고, 그곳에서 구인광고를 게재해 둔 것을 보게 되었다. 외국인들과 생활을 했기에 영어를 스쳐 지나간 경험으로 지원해 보게 되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회사에 대한 정보를 쉽게 구해볼 수 있던 때는 아니었다. 일간지에 광고를 했다면, 규모가 좀 있는 회사려니 생각하고 지원을 하게 된 것이다. 그 일은 전화영어수업을 해 주고, 회사의 콘텐츠 판매도 함께 하는 일이었다.

 

한 달 동안 회사 상품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영어수업을 해주고, 콘텐츠 설명도 해주면서 나름 호응이 괜찮았었다. 그러더니 사장님이 나더러 대리를 하라고 하는 것이다. 엥? 한 달 만에 대리가 되는 회사?

사장님이 개발한 '원어민처럼 영어을 익히는 학습법'을 주로 02-5**-*** 전화번호를 가진 사람들이 주로 구매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강남권 사람들인 것이다. 첫 월급 받기 전부터 인센티브도 가끔 받았기에 대우가 나쁘질 않다고 생각하였다.

회사 내에서 만난 여러 직원들과 사귀면서, 재미도 있었고 수업이 없을 때면 가끔 그들이 사는 이야기도 들으며 서울에서의 첫 직장생활도 할만하구나 여겨졌었다. 그들이 사는 이야기는 연애사, 부부 관계, 아주 젊었던 청춘시절 사고 쳤던 이야기 등등 참 다양했다. 사실 한심한 이야기도 너무 많아서 듣고 있자니 내가 이상한 건지, 그들이 이상한 건지 구분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사장님이 개발한 컨텐츠의 1권 판매한 후 한 달쯤 지나 2권을 보내야 할 시점에 2권 시리즈 책이 보이질 않았다. 빨리 인쇄해달라는 요청을 했고 사장님은 기다려 달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사장님은 지사 모집 설명회 준비에 바빴고 신문사의 대강당을 빌려서 설명회를 개최하였다.   '원어민처럼 영어를 익히는 학습법'이라 하여 그 당시에는 잘 들어보지 못한 획기적인 학습법이었기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드디어, 행사는 시작되었고 뒤에서 지켜보면서 나와 직원들은 어떤 프리젠테이션을 사장님이 하실지 궁금해하였다.

 

사장님이 준비하신 것은 음... 커다란 화이트보드.

 

설명회는 망했다.

그는 화이트보드에 자신이 개발했다는 컨텐츠를 판서해 가며 설명회 참가자들에게 어필하였다.

나와 직원들은 보면서 우리와 아무런 의논도 하지 않았었고, 설명회랍시고 화이트 보드 앞에 서있는 자신의 몸뚱이 하나와 나불거리는 입만 준비한 것이다. 무슨 회사의 설명회가 이렇담?

내 기억으론 그 설명회 이후, 인센티브도 끊겼고 월급날이 되어도 사장은 월급을 주지 못했다. 그래도 다들 조금 기다려 보았으나 사장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 회사 경리를 통해 사장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신문사 대강당 대관료를 지급하지 않았고, 내가 처음 보았던 유명 일간신문사의 광고료도 밀렸다는 것이다. 또한, 사장은 고시원에 산다는 것이다.

이에 분노의 아우성에 가득 찬 직원들에게 회사 경리는 고용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처리를 해 주겠다고 직원들에게 얘기해주었다.

회사는 망했고 사장이 도망갔다고 모두가 깨달은 날, 나는 회비를 내고 등록한 회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대강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더 이상의 회비를 납부하지 못하도록 설명해주었다. 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양심적인 행동을 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회사 경리도 직원들이 화가 나 있어도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녀들은 사장과 한 편이었고,  '원어민처럼 영어를 익히는 학습법'이란 것은 없었다.

 

나는 취업사기를 당한 것이다!!!

눈뜨고 코베이는 곳이 서울이라더니, 나는 정말 눈뜨고 있는데 코가 베였고 너무 창피하였다. 부산의 친구들은 서울로 취업해 갔다고 축하해 주었고, 부모님도 직장 생활 잘하는지 물론 걱정 많으셨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서울에서 취업사기를 당했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월급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미끼로 받은 인센티브도 다 떨어지고 난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을 아시게 된 이모님께서 나에게 봉투에 30만 원을 담아 주신 것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첫 서울 생활에 방 하나 내어주시고 취업사기를 당한 나에게 돈까지 주셨으니 말이다. 가장 힘들 때, 도움이 있다는 것은 급한 불을 얼른 끄는 것과 같다. 그래서 급한 불을 만난 사람에게 나도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난 너무 창피하였다. 내 꼴이 이게 무엇인가! 하필이면 어버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때여서 더욱 비참했다.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돈도 없고 서울에 있을 명분이 없는 것이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또한 이 비참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일자리를 검색하던 중, 나이 제한에 좀 관대한 자리가 있어 지원서를 내어보았다. 그 당시 난 적은 나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름에 비해 구인광고가 초라했지만 알만한 이름이었기에 '최소한 사기는 치지 않겠지?' 생각하며 기약 없이 서류통과 소식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다만, 어버이날 부모님께 아무런 용돈이나 선물도 줄 수 없었던 그 비참함과 부끄러움을 견디며 기다려야 할 뿐. 그리고 짐을 싸 두었다.

 

죽지 말라는 법은 없나 보다. 그 회사의 이사님이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전화가 온 것이다. 그 날은 어버이 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면접을 보러 간 날, 사장님은 나의 이력서를 보고 해외에서 봉사활동을 한 경력을 눈여겨보셨다.

 

취업사기와 맞물려 새로운 이력을 쌓아 준 새 회사는 어버이날 아마도 내게 합격 통보를 했던 것 같다.

 

모르겠지만 인생의 두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절망 뒤에 바로 따라오는 희망의 톱니가 절망의 빈 곳을 메워 들어간다. 또 절망은 찾아오고 희망이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간다. 이 두 톱니바퀴가 돌고 도는 서울생활에서 나는 계속 두 바퀴에 잘 기름칠을 해 주어야 한다. 두 톱니바퀴가 모두 잘 돌아가도록 말이다.

아..... 겨우 살았다 흑 ^^;; 

 

2006년 5월의 봄.

 

그 날의 교훈! 의심스러우면 꼭 주변의 경험많은 사람에게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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